[Book] 자기앞의 생 - 에밀 아자르 혹은 로맹 가리 책의 향기

자기 앞의 생자기 앞의 생 - 8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문학동네

책을 끝까지 읽고 덮고 났을 때의 먹먹함과 감동이라니... 한 소년이 성장하고, 사랑을 알게 되고, 고통을 알게 되는 이야기다. 사람이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것에 대해, 소년의 눈으로 바라본 감성과 깨달음이 담겨 있다.

배경은 1960년대 프랑스의 뒷골목. 모모는 창녀들의 아이들을 맡아 길러주던 로자 아주머니와 3살때부터 아파트에서 같이 살고 있다. 10년여 동안 자신을 길러 주던 로자 아주머니가 뇌혈증을 앓으면서 점점 죽어가게 되자, 이번에는 어린 모모가 돌봐주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존엄을 잃은 채 버려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아주머니를 위해, 모모는 비밀스런 약속을 한가지 하게 되는데...

작가 전경린이 해설에서 남긴 아래의 문장은 함축적이며 이 책의 주제를 잘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o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사람, 로자 아줌마를 죽인 것은 생이지만 그녀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것도 바로 그 신비롭고 경이로운 生이라는 사실 또한, 그건 모모의 깨달음이자 곧 그 책을 읽는 우리들의 깨달음이기도 할 것이다. `차라리 모르는 게 더 나은 일들이 많은` 어린 날들은 곧 지나가 버린다.

o ˝자기 앞의 생˝은 비범한 일을 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비범한 일이란, 사랑을 깨닫고 그것을 실천하는 일이다. 모모는 내게 말해 주었다. 슬픈 결말로도 사람들은 행복해 질 수 있다는 것을.

22장에 나오는 모모 아버지의 등장은 다분히 상징적이고 비평가에 대한 작가의 통쾌한 복수 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있는 그대로의 아들을 받아 들이기를 주저하고 로자 아주머니와 모모의 장난에 격분하던 모모의 아버지는 그만 심작 발작으로 죽고 만다. 로맹 가리라는 작가의 이름으로 쓴 작품에는 혹평을 쏟아붓던 비평가들이 에밀 아자라는 필명으로 쓴 작품에는 찬사를 보내는 것을 본 작가가 비평가들에게 보내는 통렬한 메세지 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o 유세프 카디르 씨는 일어선 채로 공포에 가득 찬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마치 즉흥적인 절망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원래 대로의 내 아들을 돌려 주세요. 유태인은 싫어요. 온전한 회교도인 내아들을 돌려달라구요!˝
˝아랍인이건 유태인이건 여기에서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당신이 정말로 아들을 원한다면 지금 그대로의 아이를 받아들이세요. 아이 엄마를 죽여 놓고, 자기가 정신 병자라고 자처하더니 이제 아들이 유태인으로 컸다고 난리를 하는 군요! 모세야, 네 아빠에게 가서 키스하렴. 그래서 네 아빠가 죽는다고 해도 아빠는 아빠니까!˝
˝어쩔 수 없잖아.˝
내가 말했다. 나는 네 살을 더 먹게 되었다는 생각이 기분이 괜찮아졌다.
모세는 유세프 카디르 씨를 향해 한 발짝 다가섰다. 그러자 남자는 자기 말이 맞다는 것도 모른 채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애는 내 아들이 아니야!˝
그리고 다음 순간 극적인 일이 벌어졌다.

이 책을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책의 저자에 대해 우선 알아야겠다. 1980년 12월 2일 프랑스의 유명 작가 로맹가리는 입안에 권총을 넣고 방아쇠를 당긴다. 그의 나이 66세였고, 그가 사랑했던 아내 진 세버그가 죽은지 1년이 넘은 때였다. 그가 죽은 지 6개월 후인 1981년에 유서처럼 남긴 글이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 이라는 제목의 소 책자로 출간 된다. 이 책은 `에밀 아자르` 라는 촉망 받던 젊은 작가가 바로 `로맹 가리` 자신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프랑스 원로 작가의 이 엄청난 고백은 프랑스 문단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도 그럴것이 같은 작가에게 두번 수상되지 않는다는 `콩쿠르` 상을 `하늘의 뿌리` 라는 소설은 로맹 가리의 이름으로 1945년에, `자기 앞의 생`은 에밀 아자르 라는 이름으로 1975년에 수상하게 되는 유례 없는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자기 앞의 생이 쓰여진 해가 그의 나이 61세였다.)

아무런 배경 지식 없이 이 책을 읽으면 이 책은 20대의 작가의 시선으로 그려진 슬프고도 아름다운 소년의 성장기와 사랑 이야기가 되지만, 61세의 원로 작가의 손에서 쓰여 졌다고 생각하면 느낌이 사뭇 달라진다.

작가가 소 책자에 남긴 일부 말들을 보자

o 한번은 어느 일간지에 나에 대한 칭찬 일색의 평이 나온 적이 있었다. 내 소설 ˝유로파˝에 대한 것이었다. 일년 후, 나는 `매혹적인 사람들`을 발표했는데, 같은 비평가가 같은 신문에 한 페이지 가득 지독한 혹평을 실었다. 몇 주 아니면 한 달쯤 뒤, 나는 그 사람을 시몬 갈리마르 부인의 집 저녁만찬 자리에서 만났다. 그녀는 좀 불편해 보였다.
˝`매혹적인 사람들`에 대한 저의 혹평에 놀라셨지요?˝
˝으음.....˝
˝`유로파`에 대해 그렇게 호평을 했는데도, 당신은 저에게 감사의 말 한마디 없으시더군요.....˝

o 그리고 문학세계에 혜성처럼 나타난 오촌조카 에밀 아자르를 약간 질투하고 조금은 슬퍼하고 있는 로맹 가리가 불쌍하다는 말이 사교계의 저녁식사 자리에서 흘러나와 내 귀로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 ˝이 선 너머에서 당신의 티켓은 유호하지 않습니다˝ 에서 나 자신의 쇠퇴를 고백하게 되고.......
나는 그것들을 무척 즐겼다. 안녕. 그리고 감사한다.

1979년 3월 21일
로맹 가리 -

어떠한 배경 지식으로 읽어도, 위대한 작품이 주는, 작지 않은 울림에는 변화가 없다. 1975년에 발간 되고, 2003년에 번역되어 2012년에 전자책으로 재 발간된 이 책의 생명력은 마치 어제 오늘 쓰여진 것처럼 팔딱인다.

<책 속에서>

o ˝하밀 할아버지, 로자 아줌마는 이제 유태인이고 뭐고 할 것도 없어요. 그저 안 아픈 구석이 없는 할머니일 뿐예요. 그리고 할아버지도 이제 너무 늙어서, 알라신을 생각해줄 처지가 아니잖아요. 알라신이 할아버지를 생각해줘야 해요. 할아버지가 알라신을 보러 메카까지 갔었으니까 이제는 알라신이 할아버지를 보러 와야 해요. 여든 살에 뭐가 무서워서 결혼을 못 하세요?˝
˝우리가 결혼해서 뭘 어쩌겠니?˝
˝고통을 서로 나눠 가질 수 있잖아요. 젠장, 다들 그러려고 결혼을 하는 거래요.˝
˝나는 결혼하기에는 너무 늙었단다.˝
하밀 할아버지는 다른 일은 뭐든 다 할 수 있지만 결호늘 하기에만은 늙었다는 듯이 말했다.

o ˝언젠가는 저도 진짜 책을 한 권 쓸거예요, 할아버지. 모든 얘기들이 다 감겨 있는 책 말예요. 빅토르 위고가 쓴 책 중 가장 훌륭한 책이 뭐예요?˝

o ˝언젠가는 저도 불쌍한 사람들(빅토로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 `불쌍한 사람들이란 뜻임- 옮긴이)에 관한 이야기를 쓸 거예요.˝

o 나는 로자 아줌마에 관해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즐거웠다. 로자 아줌마에 관한 이야기는 늘 나를 즐겁게 한다. 나는 로자 아줌마가 창녀였으며, 독일 유태인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왔고, 창녀의 아이들을 맡아 기르는 일을 해왔다는 것도 이야기했다. 불법 매춘을 하는 여자들은 양육권이 없어서 아이를 기를 수 없게 되어 있는데다, 비열한 이웃이 고발이라도 하면 아이들이 빈민구제소에 보내지기 때문에 로자 아줌마가 창녀의 아이들을 은밀히 맡아서 길러주었다고 말이다.

/.


http://wiky.egloos.com2014-09-11T15:17:040.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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